Spurgeon(0200) 18580613 The Wicked Man’s Life, Funeral, and Epitaph(악인의 삶과 장례, 그리고 묘비명)
on Sabbath Morning, at the Music Hall, Royal Surrey Gardens
악인의 삶과 장례, 그리고 묘비명
(전 8:10)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오늘날 도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시신을 매장하면서 살아있는 우리와 죽은 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장례 행렬을 보거나 묘지 사이를 거니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사실 죽음을 마주하고 묘비를 바라보는 일은 우리 영혼에 매우 유익하고 장엄한 설교가 되어 줍니다.
옛적 시골마을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돌아간다는 말이 들릴 때 어린아이들의 마음에도 깊은 경각심과 영적 생각들이 싹텄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죽은 자를 눈앞에서 치워버렸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이에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전도서 8장 10절의 말씀인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세 가지 영적 여정을 떠나고자 합니다. 살아있을 때 거룩한 곳을 오가던 악인의 걸음을 함께 걷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며, 마지막으로 그의 묘비를 함께 써 내려가고자 합니다.
I. 첫째, 거룩한 곳을 오고 가는 악인의 삶
우리가 거룩한 곳이라고 부르는 장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입니다. 매 주일 수많은 인파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주님의 집으로 몰려드는 광경은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지만 이 무리를 유심히 해체해 보면 그 속에는 온갖 악인이 섞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난밤 유흥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있는 사람, 예배가 끝나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모독할 사람, 거짓말과 사기와 음란한 죄에 물든 이들이 주님의 집을 함께 출입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거룩한 곳에 올 때 처음에는 극장이나 오락거리를 찾듯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설교를 들으며 때로는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떨기도 하며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가지만,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찰나의 물결과 같습니다. 주일마다 진리의 화살이 심장을 찌르고 하나님의 엄위와 자비의 목소리가 선포되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음은 전쟁터의 말처럼 무감각해집니다. 더 이상 말씀 앞에서 떨지 않고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결국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경직되고 맙니다.
나아가 교회 교인으로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여 겉모습을 거룩하게 포장할지라도, 본질적인 변화가 없다면 돼지가 몸을 씻어도 여전히 돼지이듯 진정한 생명이 없는 악인에 불과합니다. 또한 거룩한 곳은 재판관이 공의를 집행하는 재판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법을 어기고 타락한 죄인이면서 재판석에 앉아 다른 죄인을 정죄하고 처벌하는 악인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더 큰 죄와 탐욕에 물들어 있으면서 타인의 작은 허물을 매섭게 비판하는 가식적인 모습이야말로 법과 공의를 짓밟는 헛된 일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거룩한 곳인 설교단에 서는 악인들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단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자리이지만, 삶은 추악한 죄 가운데 거하면서 입술로만 진리를 전하는 사역자들이 존재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세상 즐거움과 잡기에 몰두하며 교회를 어둡게 만드는 자들로 인해 주님의 교회가 탄식하고 있습니다.
II. 둘째, 악인의 장례식과 그 허망함
이제 우리는 거룩한 곳을 오가던 그 악인의 장례식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는 화려한 상복이나 거창한 애도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거룩한 척하며 세상에서 명망을 얻었던 악인이 죽었을 때, 세상은 깃털 장식으로 덮인 영구차와 기다란 수레 행렬로 거창한 추모를 아끼지 않습니다. 예배당은 검은 포목으로 감싸이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의식은 위선적인 썩은 흙덩어리를 향한 허망한 연극에 불과합니다. 마귀는 그 화려한 행렬을 바라보며 영혼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조소할 것입니다. 목사가 소망 없는 자를 향해 확실한 소망으로 묻는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무서운 착각입니다. 위선자의 죽음에는 화려한 장례보다 썩은 고기처럼 던져지는 수치스러운 종말이 마땅합니다.
반면에 경건한 사역자가 지켜보는 조용하고 진실한 장례식도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목자는 악인의 시신 앞에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함부로 말하지 못하며 깊은 침묵과 안타까운 눈물로 유족을 위로합니다. 그리고 주일 설교에서 그 악인의 삶을 경고의 등대로 삼아 남은 이들에게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죽음과 장례식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밭에 핀 화려한 양귀비는 결국 불살라지지만, 알곡은 기쁨의 수확 소리와 함께 곳간에 모아집니다. 스데반이나 경건한 성도들, 그리고 신실하게 주를 섬긴 종들의 장례식처럼, 성도의 죽음은 주님 보시기에 귀하며 깊은 애도와 거룩한 향기를 남깁니다.
하지만 악인의 썩어가는 관 속에 숨겨진 진실을 본다면, 거기에는 그가 평생 품었던 허망한 소망과 가식적인 외식이 시신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의인인 척하고 구원받은 척했던 모든 가면이 벗겨지고 수치와 멸시만 남게 됩니다. 더욱이 악인은 죽은 후에도 세상에 기억되고자 애쓰지만, 성경 말씀대로 그들이 행한 성읍 안에서 완전히 잊혀버리고 맙니다.
그가 떠난 후 가난한 자도, 교회도, 후대 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며, 세월이라는 벌레가 그의 악한 영향력과 기억을 완전히 먹어 치워버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섬긴 존 번연과 같은 경건한 이들의 이름과 유산은 세대를 넘어 영원히 기억되고 빛납니다.
III. 셋째, 악인의 묘비명과 헛된 종말
이제 우리는 그 악인의 무덤 위에 새겨질 묘비명을 써야 합니다. 그의 묘비명은 성경 본문이 말하듯 “이것도 헛되도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멸망하기로 작정했다면, 거룩한 곳에 출입하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심판의 경고를 듣는 고통을 겪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고 괴로운 노역입니다.
마음의 변화도 없으면서 경건한 척 예배 자리에 앉아 자신과 상관없는 천국의 약속을 듣고 자신에게 임할 지옥의 형벌을 들으며 형식적으로 출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따라서 그 악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절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할 용기조차 없었던 자가 누워 있다. 그는 종교적인 척할 만큼 어리석었고,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해 위선자일 만큼 악했다“.
가식을 떨며 종교의 탈을 쓴 자는 하나님을 전면 부정하는 자보다 더 큰 조롱과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선택하고 자기 의와 세상의 정욕을 선택하는 것은 곧 영원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 죄악이며 그 아래에 지옥이 놓여 있습니다. 헛되고 가식적인 종교 생활을 버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날, 악인의 허무한 묘비명이 아닌 의인의 거룩한 안식을 얻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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